이지희 색채주제에 의한 변주곡 Variation on the chromatic themes
수많은 빛들로 둘러싸인 세상에 살고 있다. 이로 인해 삼라만상의 사물들을 볼 수 있는 것이겠지만 때로는 빛 자체를 바라보면서 정서적인 영향을 받기도 하고, 공간을 가득 메운 빛에 의해 압도당하기도 한다. 실체가 있는 듯 없는 듯한 신비한 존재감으로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기에 예로부터 Lux나 Lumen과 같은 이원화된 빛에 대한 인식이 자리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시적이면서 비가시적인 빛의 특질은 물질적인 측면만큼이나 정신적인 면들이 부각되었기에 작가들이 붙잡고 싶어 하는 예술의 주요 관심이 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존재하지만 이내 그 실체를 감추고 마는 빛의 속성으로 인해 빛이 예술이 되기 위해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함께 해야 했다. 이지희 작가가 꾸준히 천착해온 LED는 그런 면에서 빛을 다루는 꽤나 효율적인 재료이자 매체였고, 작가는 통념상의 LED 용법을 넘어 이를 작가 고유의 작업의 자원으로 전용하는 작업을 펼쳐내고 있다. 빛을 발하는 반도체 소자인 LED(light emitting Diode)는 여러 가지 면에서 기능성과 활용도가 뛰어난 현대문명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고효율․ 높은 색감․ 빠른 반응속도 ․조작과 활용의 용이성에 최근 경제적 효용성까지 더해져, 핸드폰이나 텔레비전의 액정화면 조명과 같은 일상의 공간에서 거리의 대형 전광판이나 건물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시공간의 구석구석을 점령하고 있는 중이다. 알게 모르게 도처에 편재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문명의 이기인 셈이다. 특별한 테크놀로지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동시대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지희 작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아무래도 이런 일반화된 효용성이나 쓰임새만은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도 LED가 구사할 수 있는 수만 가지의 탁월한 색감과 이를 쉽게 제어할 수 있는 기술적인 효율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LED의 존재론적 속성이라 할 만한 것에 작가는 관심을 기울인다. LED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픽셀처럼 작은 광원들이 하나하나 독립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져 이들이 다시 전체적으로 빛을 발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모듈처럼 형태의 구성이 자유로운 셈이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LED가 R(ed),G(reen),B(lue) 세 가지 색을 한 픽셀로 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이미지이면서도 다시 움직임에 의해 전체적인 빛의 효과를 달리해간다는 점이다. 여기에 LED 광원 앞에 덧대는 반투명 아크릴이나 플렉시 글라스 등의 막에 의해 반사되고 굴절될 경우 독립적인 점의 형태가 무너지면서 마치 빛이 흐르는 듯한 효과가 창출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개별적인 빛이 서로 섞이고 중층화 되는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레이어처럼 겹쳐지면서 다른 색감의 빛이 발산된다는 것인데, 이는 팔레트에 물감을 섞어 다른 색을 구현하는 과정과 그대로 닮아 있는 면모들이다. 또한 점, 선, 면의 표현이 모두 가능하다는 면에서 회화의 그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더구나 기술적으로 제어마저 용이하다고 하니 LED의 이러한 빛의 존재론적인 측면과 자유로운 적층화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꽤나 매력적인 속성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LED의 이러한 속성들을 작업의 주요 요소로 충분히 끌어들인다. <Composing> 시리즈는 이에 대한 작가의 충분한 숙고를 보여준다. 이 작업들에서 보여 지는 충분한 색 면들은 사실 정지된 이미지가 아니라 알고리즘에 의해 계속적으로 변화되고 있는 이미지들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색상, 명도, 채도 등의 빛의 기본적인 속성을 실험하면서도 마치 회화와도 같은 화면을 연출한다. 시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작업에 입혀지는 것은 물론, 동적이면서도 정적인 이미지가 작용함으로써 회화의 본원적인 문제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계속해서 매 순간 변화하고 있는 이미지는 결국 매 순간 다른 정서와 느낌으로 자리하는 회화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 상태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LED 픽셀의 최소단위에 대한 고민과 이를 기반으로 한 단순하지만 규칙적인 화면의 구성은 추상미술의 개념적인 속성을 연상시키게 한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작업을 곰곰이 생각할 때, 일반 테크놀로지 아트와는 다른 오래된 회화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LED의 속성을 점으로, 선으로, 면으로 활용하거나 다시 이를 레이어 삼아 다른 빛들을 덧칠해가는 그 모습은 도구만 달랐지 회화의 그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본적으로 공간으로 발산하는 빛의 효과 자체도 그렇고 기술적 조절을 통해 공간에 대한 개입 또한 가능한 매체이니 충분히 회화의 영역을 넘어서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색의 변화나 경계의 조작을 통해 형태나 공간으로의 파장효과까지 제어할 수 있는 매체이니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음악적일수도 있겠다. 작가는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 LED가 갖고 있는 이러한 매체적인 속성 십분 활용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Color Shade(Blind)>도 그런 면에서 흥미를 끄는 작업이다. 개념상으로 빛을 막는 역할을 하는 블라인드의 속성을 뒤집고, 블라인드의 그림자 효과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블라인드 자체가 스스로 변화하는 빛을 발산하도록 설정하여 빛이 가지고 있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만 그 실체감을 드러내지 않는 빛의 양면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빛으로 빛을 가리면서도 다시 다른 빛으로, 그림자와도 같은 은은한 빛을 내는 논리는 개념의 적합성을 넘어 흥미로운 사유의 지점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의 흐름도 눈길을 잡아끈다. 무수한 색의 빛이 서로 섞이면서 부단한 변화를 통해 자리하기에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깊이 있는 밝음으로 자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내밀하기만 한 빛과 색의 효과에 정신을 사로잡히는 것은 단순히 LED 테크놀로지의 사용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빛이 가진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효과나 정신적인 감응, 개별과 전체를 모듈로 구성할 수 있는 형태적 배열의 용이성에서 미학적인 근거를 먼저 찾았기 때문인 듯싶고, 이에 대한 진지한 작가적 태도도 한몫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믿음 대신 상대적인 변수를 열어놓아 작업이 가진 수많은 열린 효과를 긍정하는 면모들도 테크놀로지를 통해 정신적이고 개념적인 것을 담아내려는 작가적 지향으로 읽혀지는 이유들이다.
열려있는 것, 잠재적인 것의 현실태로의 다양한 전화에 대한 관심은 다시 LED의 상호작용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LED는 컴퓨터로 제어가 가능할 뿐 아니라 센서를 결합시킬 수 있어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만드는데 용이한 매체이다. 센서란 결국 외부의 대상에 반응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열려있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품과 관객과의 고전적인 설정이라 할 수 있는 정태적이고 고정적인 관계를 확장하는 것이고, 지속되는 새로운 반응에 따른 결과들을 창출할 수 있어 결과적으로 매순간 새로운 원본성을 획득하게 된다. 스스로의 프로그램에 따른 자체 변화에 이렇게 외부의 반응에 따른 변화가 더해진다면 사실상 개념적으로는 살아있는 그것과 진배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객이 이미 주어진 결과물에 따른 제한된 반응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는 면에서, 그리고 그러한 관객의 참여가 무한히 열려 있다는 면에서 작가가 관심을 두고 있는 상대적인 것, 변화에 대한 지향을 그대로 충족할 수 있게 된다. 고정된 시점에서의 하나만의 진리가 아닌 다양한 시점에서 함께 새로운 복수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들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용이 빛을 통한 상호작용이기에 미세하고 정서적인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면도 중요하게 눈여겨볼 점이다. 이를테면 공조를 통해 섬세하고 정신적인 감각상의 변화를 관객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원으로 된 바를 사용하여 만든 <Coloring>은 LED의 기본 색 구조이자 빛의 삼원색이기도 한 R, G, B 세 개의 링을 관람객의 거리 반응에 따라 움직이도록 만든 작품이다. 빛의 원색들이 서로 섞이고 겹쳐지면서 색의 변화를 관객의 움직임과 함께 만들어 낸다. 다양한 색이 공존하고, 부단한 변화에 의해 찰나로만 순간 발휘되는 이러한 색의 표현은 어떠한 회화로도 가능하지 않은 작업이기에 매체 활용의 독특한 즐거움이 더해진다. 더구나 수많은 색에 대한 작업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빛의 삼원색으로 포커스를 두고 있어, 개념적이고 근본적인 것에 대한 작가의 지향을 읽을 수 있다. 마치 예전 추상미술이 원형적인 색과 형태로 세상의 본질적인 것들을 환원했듯이 말이다. 상호작용성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실험들은 전작들에서 꾸준히 시도됐던 것들이기도 하다. <Elusive Light> 시리즈는 관객이 움직임에 따라 빛이 도망가거나 쫓도록 반응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어, 작품이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기능하도록 만든 작품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관람객의 움직임을 작품을 통해 이미지화시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신체적 움직임을 통한 체험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작용, 지각과정도 결국 이렇게 몸의 변화를 통해 얻어지는 것을 역설하듯 말이다. LED는 부착되는 센서에 따라 다양한 요소들을 인터렉션화 시킬 수 있어 여러 가지 감각으로 작품을 구동시킬 수 있다. <SoundSpace>의 경우 관객이 위치한 공간적 데이터를 이미지와 사운드로 변환시키는 작업이다. 관객의 서있는 지점과 신체의 변화로 작품의 각기 다른 반응을 이끌어내는 작업으로, 관람객 자신이 서 있는 공간 내의 상태를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Cube>는 더 나아가 감지되는 사람의 숫자에 따라 색 면이 변하게 함으로써 관객의 신체적 움직임을 통한 인터렉션을 게임처럼 확장시킨 작품이다. 사실 복잡한 관계반응을 이끌어내는 테크놀로지 아트도 많겠지만 작가가 활용하는 LED의 상호작용성은 그 구동원리는 간단하다할 지라도, 작품과 관람자간의 근원적인 관계를 되묻고 성찰하도록 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동시에 빛을 통한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보다 감각적으로 이를 지각하고 체험케 한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테크놀로지를 통한 기계적 구동으로서의 인터렉션이 아닌 자연화 된 존재로서의 관객의 움직임과 반응을 작품으로 가시화시키고 이를 통해 작품과 관람객과의 다채로운 관계성을 성찰할 수 있는 요소로서 상호작용성을 고민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작품에 대한 고전적인 몰입이 아닌 관객의 존재를 작품에 이끌어 들이면서 그 공조된 관계를 통해 작품을 구동시키며, 매순간 다른 상태로 자리하는 작품의 현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LED 작업의 특성상 얼마간의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겠지만, 작가는 작가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지희 작가 역시 그런 면에서 지극히 작가적인 관점과 태도로서 테크놀로지를 대한다. 어쩌면 작가가 활용하는 테크놀로지가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기술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제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작업세계를 구축해간다. 이를테면 디지털 이미지이긴 하지만 이미지와 색, 형태에 대한 본원적인 관심과 지향을 담아내기도 하고 섬세한 색 감각이 발휘되어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치 회화의 그것처럼 말이다. 이렇게만 본다면야 텅 빈 공간을 화폭으로 삼아 LED 매체로 붓질을 하여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화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관객의 신체적 움직임을 작품의 과정으로 이끌어 들여 매순간 존재하는 새로운 지각의 장을 만들어내기도 하니 작가는 분명 다른 지반에 서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LED의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속성마저 작가와 닮은 것 같기도 한데 내향적인 듯하지만 부단한 시도를 통해 매체가 갖는 다양한 속성들을 활용하여, 늘 새로운 작업으로 외화 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작가의 다음 작업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되는 것 같다.
-민병직(미학,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많은 빛들로 둘러싸인 세상에 살고 있다. 이로 인해 삼라만상의 사물들을 볼 수 있는 것이겠지만 때로는 빛 자체를 바라보면서 정서적인 영향을 받기도 하고, 공간을 가득 메운 빛에 의해 압도당하기도 한다. 실체가 있는 듯 없는 듯한 신비한 존재감으로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기에 예로부터 Lux나 Lumen과 같은 이원화된 빛에 대한 인식이 자리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시적이면서 비가시적인 빛의 특질은 물질적인 측면만큼이나 정신적인 면들이 부각되었기에 작가들이 붙잡고 싶어 하는 예술의 주요 관심이 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존재하지만 이내 그 실체를 감추고 마는 빛의 속성으로 인해 빛이 예술이 되기 위해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함께 해야 했다. 이지희 작가가 꾸준히 천착해온 LED는 그런 면에서 빛을 다루는 꽤나 효율적인 재료이자 매체였고, 작가는 통념상의 LED 용법을 넘어 이를 작가 고유의 작업의 자원으로 전용하는 작업을 펼쳐내고 있다. 빛을 발하는 반도체 소자인 LED(light emitting Diode)는 여러 가지 면에서 기능성과 활용도가 뛰어난 현대문명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고효율․ 높은 색감․ 빠른 반응속도 ․조작과 활용의 용이성에 최근 경제적 효용성까지 더해져, 핸드폰이나 텔레비전의 액정화면 조명과 같은 일상의 공간에서 거리의 대형 전광판이나 건물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시공간의 구석구석을 점령하고 있는 중이다. 알게 모르게 도처에 편재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문명의 이기인 셈이다. 특별한 테크놀로지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동시대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지희 작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아무래도 이런 일반화된 효용성이나 쓰임새만은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도 LED가 구사할 수 있는 수만 가지의 탁월한 색감과 이를 쉽게 제어할 수 있는 기술적인 효율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LED의 존재론적 속성이라 할 만한 것에 작가는 관심을 기울인다. LED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픽셀처럼 작은 광원들이 하나하나 독립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져 이들이 다시 전체적으로 빛을 발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모듈처럼 형태의 구성이 자유로운 셈이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LED가 R(ed),G(reen),B(lue) 세 가지 색을 한 픽셀로 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이미지이면서도 다시 움직임에 의해 전체적인 빛의 효과를 달리해간다는 점이다. 여기에 LED 광원 앞에 덧대는 반투명 아크릴이나 플렉시 글라스 등의 막에 의해 반사되고 굴절될 경우 독립적인 점의 형태가 무너지면서 마치 빛이 흐르는 듯한 효과가 창출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개별적인 빛이 서로 섞이고 중층화 되는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레이어처럼 겹쳐지면서 다른 색감의 빛이 발산된다는 것인데, 이는 팔레트에 물감을 섞어 다른 색을 구현하는 과정과 그대로 닮아 있는 면모들이다. 또한 점, 선, 면의 표현이 모두 가능하다는 면에서 회화의 그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더구나 기술적으로 제어마저 용이하다고 하니 LED의 이러한 빛의 존재론적인 측면과 자유로운 적층화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꽤나 매력적인 속성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LED의 이러한 속성들을 작업의 주요 요소로 충분히 끌어들인다. <Composing> 시리즈는 이에 대한 작가의 충분한 숙고를 보여준다. 이 작업들에서 보여 지는 충분한 색 면들은 사실 정지된 이미지가 아니라 알고리즘에 의해 계속적으로 변화되고 있는 이미지들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색상, 명도, 채도 등의 빛의 기본적인 속성을 실험하면서도 마치 회화와도 같은 화면을 연출한다. 시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작업에 입혀지는 것은 물론, 동적이면서도 정적인 이미지가 작용함으로써 회화의 본원적인 문제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계속해서 매 순간 변화하고 있는 이미지는 결국 매 순간 다른 정서와 느낌으로 자리하는 회화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 상태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LED 픽셀의 최소단위에 대한 고민과 이를 기반으로 한 단순하지만 규칙적인 화면의 구성은 추상미술의 개념적인 속성을 연상시키게 한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작업을 곰곰이 생각할 때, 일반 테크놀로지 아트와는 다른 오래된 회화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LED의 속성을 점으로, 선으로, 면으로 활용하거나 다시 이를 레이어 삼아 다른 빛들을 덧칠해가는 그 모습은 도구만 달랐지 회화의 그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본적으로 공간으로 발산하는 빛의 효과 자체도 그렇고 기술적 조절을 통해 공간에 대한 개입 또한 가능한 매체이니 충분히 회화의 영역을 넘어서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색의 변화나 경계의 조작을 통해 형태나 공간으로의 파장효과까지 제어할 수 있는 매체이니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음악적일수도 있겠다. 작가는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 LED가 갖고 있는 이러한 매체적인 속성 십분 활용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Color Shade(Blind)>도 그런 면에서 흥미를 끄는 작업이다. 개념상으로 빛을 막는 역할을 하는 블라인드의 속성을 뒤집고, 블라인드의 그림자 효과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블라인드 자체가 스스로 변화하는 빛을 발산하도록 설정하여 빛이 가지고 있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만 그 실체감을 드러내지 않는 빛의 양면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빛으로 빛을 가리면서도 다시 다른 빛으로, 그림자와도 같은 은은한 빛을 내는 논리는 개념의 적합성을 넘어 흥미로운 사유의 지점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의 흐름도 눈길을 잡아끈다. 무수한 색의 빛이 서로 섞이면서 부단한 변화를 통해 자리하기에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깊이 있는 밝음으로 자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내밀하기만 한 빛과 색의 효과에 정신을 사로잡히는 것은 단순히 LED 테크놀로지의 사용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빛이 가진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효과나 정신적인 감응, 개별과 전체를 모듈로 구성할 수 있는 형태적 배열의 용이성에서 미학적인 근거를 먼저 찾았기 때문인 듯싶고, 이에 대한 진지한 작가적 태도도 한몫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믿음 대신 상대적인 변수를 열어놓아 작업이 가진 수많은 열린 효과를 긍정하는 면모들도 테크놀로지를 통해 정신적이고 개념적인 것을 담아내려는 작가적 지향으로 읽혀지는 이유들이다.
열려있는 것, 잠재적인 것의 현실태로의 다양한 전화에 대한 관심은 다시 LED의 상호작용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LED는 컴퓨터로 제어가 가능할 뿐 아니라 센서를 결합시킬 수 있어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만드는데 용이한 매체이다. 센서란 결국 외부의 대상에 반응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열려있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품과 관객과의 고전적인 설정이라 할 수 있는 정태적이고 고정적인 관계를 확장하는 것이고, 지속되는 새로운 반응에 따른 결과들을 창출할 수 있어 결과적으로 매순간 새로운 원본성을 획득하게 된다. 스스로의 프로그램에 따른 자체 변화에 이렇게 외부의 반응에 따른 변화가 더해진다면 사실상 개념적으로는 살아있는 그것과 진배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객이 이미 주어진 결과물에 따른 제한된 반응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는 면에서, 그리고 그러한 관객의 참여가 무한히 열려 있다는 면에서 작가가 관심을 두고 있는 상대적인 것, 변화에 대한 지향을 그대로 충족할 수 있게 된다. 고정된 시점에서의 하나만의 진리가 아닌 다양한 시점에서 함께 새로운 복수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들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용이 빛을 통한 상호작용이기에 미세하고 정서적인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면도 중요하게 눈여겨볼 점이다. 이를테면 공조를 통해 섬세하고 정신적인 감각상의 변화를 관객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원으로 된 바를 사용하여 만든 <Coloring>은 LED의 기본 색 구조이자 빛의 삼원색이기도 한 R, G, B 세 개의 링을 관람객의 거리 반응에 따라 움직이도록 만든 작품이다. 빛의 원색들이 서로 섞이고 겹쳐지면서 색의 변화를 관객의 움직임과 함께 만들어 낸다. 다양한 색이 공존하고, 부단한 변화에 의해 찰나로만 순간 발휘되는 이러한 색의 표현은 어떠한 회화로도 가능하지 않은 작업이기에 매체 활용의 독특한 즐거움이 더해진다. 더구나 수많은 색에 대한 작업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빛의 삼원색으로 포커스를 두고 있어, 개념적이고 근본적인 것에 대한 작가의 지향을 읽을 수 있다. 마치 예전 추상미술이 원형적인 색과 형태로 세상의 본질적인 것들을 환원했듯이 말이다. 상호작용성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실험들은 전작들에서 꾸준히 시도됐던 것들이기도 하다. <Elusive Light> 시리즈는 관객이 움직임에 따라 빛이 도망가거나 쫓도록 반응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어, 작품이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기능하도록 만든 작품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관람객의 움직임을 작품을 통해 이미지화시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신체적 움직임을 통한 체험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작용, 지각과정도 결국 이렇게 몸의 변화를 통해 얻어지는 것을 역설하듯 말이다. LED는 부착되는 센서에 따라 다양한 요소들을 인터렉션화 시킬 수 있어 여러 가지 감각으로 작품을 구동시킬 수 있다. <SoundSpace>의 경우 관객이 위치한 공간적 데이터를 이미지와 사운드로 변환시키는 작업이다. 관객의 서있는 지점과 신체의 변화로 작품의 각기 다른 반응을 이끌어내는 작업으로, 관람객 자신이 서 있는 공간 내의 상태를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Cube>는 더 나아가 감지되는 사람의 숫자에 따라 색 면이 변하게 함으로써 관객의 신체적 움직임을 통한 인터렉션을 게임처럼 확장시킨 작품이다. 사실 복잡한 관계반응을 이끌어내는 테크놀로지 아트도 많겠지만 작가가 활용하는 LED의 상호작용성은 그 구동원리는 간단하다할 지라도, 작품과 관람자간의 근원적인 관계를 되묻고 성찰하도록 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동시에 빛을 통한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보다 감각적으로 이를 지각하고 체험케 한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테크놀로지를 통한 기계적 구동으로서의 인터렉션이 아닌 자연화 된 존재로서의 관객의 움직임과 반응을 작품으로 가시화시키고 이를 통해 작품과 관람객과의 다채로운 관계성을 성찰할 수 있는 요소로서 상호작용성을 고민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작품에 대한 고전적인 몰입이 아닌 관객의 존재를 작품에 이끌어 들이면서 그 공조된 관계를 통해 작품을 구동시키며, 매순간 다른 상태로 자리하는 작품의 현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LED 작업의 특성상 얼마간의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겠지만, 작가는 작가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지희 작가 역시 그런 면에서 지극히 작가적인 관점과 태도로서 테크놀로지를 대한다. 어쩌면 작가가 활용하는 테크놀로지가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기술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제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작업세계를 구축해간다. 이를테면 디지털 이미지이긴 하지만 이미지와 색, 형태에 대한 본원적인 관심과 지향을 담아내기도 하고 섬세한 색 감각이 발휘되어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마치 회화의 그것처럼 말이다. 이렇게만 본다면야 텅 빈 공간을 화폭으로 삼아 LED 매체로 붓질을 하여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화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관객의 신체적 움직임을 작품의 과정으로 이끌어 들여 매순간 존재하는 새로운 지각의 장을 만들어내기도 하니 작가는 분명 다른 지반에 서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LED의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속성마저 작가와 닮은 것 같기도 한데 내향적인 듯하지만 부단한 시도를 통해 매체가 갖는 다양한 속성들을 활용하여, 늘 새로운 작업으로 외화 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작가의 다음 작업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되는 것 같다.
-민병직(미학,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